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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이야기/수필과 소설 사이

내 생애 첫 시합, 기억은 없는데 이겼다고?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녁,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을 마치고 상쾌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왔는데… 갑자기 사범님이 "잠깐 보자"며 저를 호출하셨습니다. (두둥!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죠.)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너, 이번에 시합 한번 나가볼래?"

"네? 시합이요? 제가 수련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합입니까?"

"에이, 경험 삼아 한번 나가봐. 재밌을 거야." (사범님의 '재밌을 것'이라는 말…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얼떨결에 제 인생 첫 시합 출전이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시합 준비'라는 거창한 이름의 훈련이 시작되었죠. 근데 뭐, 시합 준비라고 해봐야… 솔직히 평소 하던 수련에다가 마무리 운동으로 시합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해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름 비장했는데,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죠.)

 

드디어 시합 당일! 아침은 혹시 모르니 가볍게 먹고 (긴장해서 입맛도 없었지만) 결전의 장소, 시합장으로 향했습니다. 와… 도착하니 이미 엄청난 인파가! 한쪽에서는 다들 막 몸 풀면서 거의 날아다니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며 여유가 넘치는데… 저는요? 그냥 구석에 쭈그려 앉아 동공 지진 상태로 그 광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제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얀 도화지 상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가 왜 여기에? 대기선 앞에 서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입장!"

 

심판의 우렁찬 목소리에 맞춰 시합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원래라면 쭉쭉 자신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현실은 로봇처럼 삐걱삐걱, 어기적어기적… (아마 누가 봤으면 엄청 웃겼을 거예요.)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뭔가 시작되긴 했는데… 솔직히 그 이후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뭘 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심판이 제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더라고요? 네? 제가 이겼다고요? 얼떨떨했지만, 아무튼 1차전 승리!

 

곧바로 이어진 2차전. 역시나…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내 몸이 알아서 싸우는 초능력이라도 생긴 건가?) 그런데 또 이겼다고 하네요? (어리둥절 승리 적립!)

 

그리고 대망의 3차전. 상대는… 두둥! 저희 도장 사범님이셨습니다. 결과는? 네, 아주 처참하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패배했습니다. 이건 뭐… 기억이 안 날 수가 없… 아, 아니요. 이것도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선택적 기억 상실이었을지도…) 그냥 뭔가 번쩍번쩍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끝나 있었습니다. 역시 사범님은 넘사벽이셨어요.

 

그 후로도 몇 번 시합에 나갔지만, 결과는 한결같았습니다. 바로 1차전 광탈! 그래도 신기한 건, 시합에서 지고 온 다음 날부터 며칠간은 또 엄청 열심히 수련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또 금세 잊어버리고 평소의 저로 돌아가지만요.

 

돌이켜보면 저의 첫 시합은 뿌연 안갯속 같은 기억과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서 아주 짜릿한 무언가를 처음 맛본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긴장감 뒤에 숨어있던, 말로 표현 못 할 '희열'이라는 녀석을요!